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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
왜, 어떻게 인권과 관련 있나

  • 조효제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 <탄소사회의 종말> 저자)
  • 일러스트 신디강

기후변화를 주로 환경문제로 생각해 온 사람이라면 ‘기후와 인권’의 조합이 다소 생소하게 들릴 것이다.
우리는 흔히 세상을 인권, 환경, 여성, 복지, 교육, 아동 등 전문 영역별로 나누어 생각하는 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후위기는 특정영역의 문제라기보다 지구 전체와 인간사회의 모든 면에 영향을 주는 포괄적 조건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기후위기가 초래하는 각종 악영향을 환경에만 국한하여 다루어서는 안 된다.
특히 인권에서 기후위기를 중요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

기후-인권 감수성이란

기후위기를 인권문제로 다룬다는 말은 기후위기를 대하는 스토리텔링이 달라진다는 뜻이다. 기후변화의 통상적 서사는 이렇다. ‘인위적 온실가스가 기후위기를 초래했으므로 각국은 온실가스 감축을 시행해야 한다.’ 그러나 인권의 통상적 서사는 이렇다. ‘정부나 기업이 시민들의 권리를 침해하면 그들의 책임을 묻고 정의를 세워야 한다.’

기후위기를 인권문제로 보려면 그 전제로서 ‘기후-인권 감수성’이 필요하다.

우리는 자연적으로 발생한 재난 즉, ‘천재(天災)’로 피해를 보면 흔히 ‘불운’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딱히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지 잘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잘못으로 발생한 재난, 즉 ‘인재(人災)’로 피해를 보면 ‘불의’의 결과라고 생각하고 그 책임을 물으려 한다. 기후변화를 인권문제로 본다는 말은, 기후위기 피해를 더 이상 천재에 의한 불운으로 보지 않고, 인재에 의한 불의로 본다는 뜻이다. 이것이 기후-인권 감수성의 핵심이다. 기후위기로 침해되는 대표적 인권은 생명권을 위시해서 생존권, 건강권, 생계권, 식량권, 차별과 혐오, 주거권, 환경권, 스포츠권 등 거의 모든 영역에 해당한다고 보 면 된다. 그리고 노인, 아동, 여성, 장애인, 기저질환자, 토착민, 야외노동자, 그리고 에너지전환에 직접 관련이 있는 산업체 근무자 등이 기후변화의 악영향을 특히 민감하게 받는다.유엔 인권이사회의 ‘극빈과 인권’ 특별보고관은 “기후 아파르트헤이트 상황에서 부자들은 돈으로 생존을 사고, 빈곤층의 인권은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이러한 기후정의 관념을 국내에서는 계층 간, 성별 간에 적용하고, 국제적으로는 남반구와 북반부 간에 적용하고, 세대적으로는 현세대와 미래세 대 간에 적용해야 한다.

탄소중립을 달성해도 문제가 끝나지 않는다

전 세계가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한다고 낙관적으로 가정해 보자. 지금부터 2050년까지 계속 기온이 오르다가 탄소중립 시점부터 그때까지 상승한 수준에서 기온이 고정될 것이다. 당연히 2050년까지 기상이변이 지금보다 더 심해질 것이며, 탄소중립이 되더라도 기후조건이 금세 호전되지는 않을 것이다. 엄밀히 말해 탄소중립은 객관적 기후 조건을 더 좋게 만들자는 대책이 아니다. 그것은 이제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탄소중립을 하지 않았을 때의 암울한 미래를 조금이라도 덜 나쁜 미래로 만들어 보자는 방어적 논리로 구성된 대책이 탄소중립이다. 탄소중립을 아무리 낙관적이고 참신한 구호로 수식한다고 해도 이 같은 객관적 현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바로 이 때문에 기후대응에 있어 탄소 감축뿐만 아니라 사회적 조치가 핵심적으로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다.
전 세계가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한다고 낙관적으로 가정해 보자. 지금부터 2050년까지 계속 기온이 오르다가 탄소중립 시점부터 그때까지 상승한 수준에서 기온이 고정될 것이다. 당연히 2050년까지 기상이변이 지금보다 더 심해질 것이며, 탄소중립이 되더라도 기후조건이 금세 호전되지는 않을 것이다. 엄밀히 말해 탄소중립은 객관적 기후 조건을 더 좋게 만들자는 대책이 아니다. 그것은 이제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탄소중립을 하지 않았을 때의 암울한 미래를 조금이라도 덜 나쁜 미래로 만들어 보자는 방어적 논리로 구성된 대책이 탄소중립이다. 탄소중립을 아무리 낙관적이고 참신한 구호로 수식한다고 해도 이 같은 객관적 현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바로 이 때문에 기후대응에 있어 탄소 감축뿐만 아니라 사회적 조치가 핵심적으로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에너지전환으로 인해 직접 타격을 받을 노동자, 그들의 가족, 지역사회 등을 위한 정의로운 전환이 필수적이다. 정의로운 전환이 그린뉴딜의 중요한 축임은 다시 강조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노동정책에 더하여 기후-생태 위기 시대를 폭넓게 아우르는 녹색 사회정책이 함께 필요하다.
적어도 앞으로 한 세대 동안 기후위기로 인해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에 속한 계층과 회복탄성력이 낮은 계층부터 타격을 받기 시작하면서 그 충격이 사회 피라미드 의 위쪽으로 계속 전달될 것이다. 사회정책과 노동정책의 적극적인 개입이 없는 한 사회적 응집력이 와해하면서 빈부격차와 실업률 증가, 빈곤층, 노년층, 장애인, 여 성, 토착민, 사회의 소수집단들이 가장 큰 피해를 받을 것이 확실하다. 역사가 보여주듯 사회적 응집력이 떨어지고 생존조건이 열악해질수록 불만세력이 결집하고, 약자-소수자-이주노동자를 희생양으로 만들려는 경향이 커지기 쉽다. 혐오와 증오범죄 등 온갖 사회문제가 발생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 기후위기가 심해지면서 사람들의 삶의 형태와 질이 과거와 비교해 전체적으로 더 불편하고 힘들어질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의 작동양상이 하루아침에 바뀌지 는 않을 거라고 봐야 한다. 그 상태에서 심리적 정상화 기제가 작동하게 될 것이다. 상황이 나빠지더라도 어쨌든 그 상황을 ‘정상’으로 받아들이면서 그것에 적응하며 살아갈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인간은 대단한 적응력을 갖고 있으므로 악화한 상황을 심리적으로 정상화하면서 생활의 측면에서 하향 적응력을 재빨리 작동시킬 지도 모른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인정해야 한다. 끔찍한 미래가 현실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자동적으로 사회정의와 불평등 감축의 당위성을 실천 하는 쪽으로 진행되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한 사회가 집단 차원에서 의식적으로 선택하여 사회정의에 눈을 뜨고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 한, 아무리 상황이 나빠져도 그것을 합리화하는 논리, 정당화하는 이론, 달콤한 선전공세가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회현실을 부인하고 외면하고 왜곡하는 경향은 예나, 지금이나, 한 세대 후에나 여전히 기승을 부릴 것이다. 따라서 코로나 사태의 와중에 있는 오늘 당장 눈앞의 사회적 격차와 빈곤 문제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면, 앞으로 그 어떤 끔찍한 미래가 온다고 하더라도 그 상황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최근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의 부위원장인 프랜스 티머만스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저탄소 경제를 창조하는 데 따르는 비용과 혜택을 공평하게 나누려면 사회정책과 기후정책이 반드시 결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탄소중립이 되더라도 일자리나 소득을 잃은 사람들의 거센 반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기후위기에서 가장 큰 문제는 사회적 위협이다.” 크게 공감이 가는 발언이다.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길

따라서 탄소감축과 불평등 감축을 결합한 이중 감축이 우리에게 시급한 과제 가 되었다. 인권과 정의에 바탕을 둔 기후정책과 녹색 사회복지가 동시에 요 구된다. 결론적으로 탄소중립과 함께 사람들이 터를 잡은 사회적 조건을 개선 하는 것이 제대로 된 기후대응의 첫 조치이다. 그것을 통해 인권과 정의의 토대 위에서 시민들의 능동적인 참여로 이루어지 는 기후-생태 위기 극복의 위대한 드라마를 써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