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LOW 1.5℃

녹아내리는 빙하를 글꼴에 담아내
기후위기 현실을 보여준
기후위기 폰트, 빙하체

  • 슬로먼트

사람의 필체를 보면 그 사람의 대략적인 성격이나 마음가짐을 읽을 수 있다. 쓰는 사람마다 획의 굵기나 힘, 형태가 제각각이어서 느껴지는 감상 또한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직접 쓴 필체보다 컴퓨터 속 폰트가 더 익숙한 이 시대. 폰트에 사용자의 표정이 깃들 수는 없지만, 그것을 디자인한 사람의 의도와 이야기는 녹아 있다. 글꼴 디자인 스튜디오 ‘노타입(Nohtype)’의 노은유 대표, 이주희 디자이너는 폰트에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담아냈다. 그 이름은 ‘빙하체’다.

이 폰트의 시작은 핀란드다. 핀란드 신문사 ‘헬싱긴 사노마트(Helsingin Sanomat)’는 광고대행사 ‘TBWA Helsinki’와 함께 지구온난화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지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로마자 서체 ‘Climate Crisis 폰트’를 기획・제작해 무료로 배포했다. 노타입은 이 폰트의 한글 버전을 디자인했다.

거대한 빙산을 닮은 글꼴,
형체를 알아보기도 힘든 글꼴

노은유 이 프로젝트에는 제가 네덜란드에서 유학 생활할 때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인 글꼴 디자이너 에이노 코칼라(Eino Korkala)와 다니엘 쿨(Daniel Coull)이 참여했어요. 어느 날 친구들 SNS에서 Climate Crisis 폰트를 보았는데 한글 버전을 디자인하면 좋겠더라고요. 처음에는 즉흥적인 생각이었는데, 꼭 해야 할 프로젝트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침 이주희 디자이너가 노타입에 합류하면서 진행하게 되었죠. 저는 기획과 감수를, 이주희 디자이너는 디자인을 맡았습니다.

기후위기 폰트의 특징은 오픈타입 배리어블(Variabe) 폰트라는 점이다. 우리는 보통 어떤 글꼴을 사용할 때, 하나의 글꼴이 여러 가지 굵기로 나뉘어 있어 취향에 따라 선택해 사용한다. 배리어블 폰트는 사용자가 직접 굵기나 너비, 기울기 등을 조절해 사용할 수 있다. 최근 글꼴 디자인에 도입된 신기술이다.

이주희 기후위기 폰트는 ‘글자 축’을 활용해 북극해 빙하가 녹아가는 모습을 그대로 담았습니다. 미국 국립 빙설자료센터(NSIDC, National Snow and Ice Data Center)에서 측정한 1979년부터 2019년까지의 북극해 빙하량 데이터, 그리고 IPCC(기후 변동에 관한 정부 간 패널)가 현재 기후 상황이 계속되었을 때를 바탕으로 예측한 2050년의 빙하량 데이터를 활용했어요. 그래서 1979년부터 2050년까지 1년 단위로 글자의 굵기를 조절할 수 있죠.

기후위기 폰트는 로마자, 한글 버전 모두 1979년과 2050년 타입을 비교했을 때 그 차이가 가장 극명하다. 1979년 타입은 거대한 빙산을 연상할 수 있는 아주 넓적한 굵기이고, 2050년 타입은 대부분 녹아내려 얼마 남지 않은 빙하를 연상할 수 있도록 글자의 형태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다. 로마자 버전 디자인은 가로획이 대부분 생략되어 있을 정도다.

이주희 한글 버전의 특징을 꼽는다면, 1979년 타입은 넓적한 붓으로 글자를 쓴 듯한 모양새로 거대한 빙하의 느낌을 주는 동시에 과감하고 힘찬 획을 통해 심미성이 돋보이도록 했습니다. 2050년 버전은 가로획이 대부분 생략된 로마자와 달리 한글 버전에서는 글자의 가독성을 유지하기 위해 얇게나마 유지했습니다. 한글 버전은 얼음이 녹아내리는 모양새를 로마자보다 많이 반영했어요.

노은유 두 가지 언어가 하나의 폰트에 묶여야 했기에, 어떻게 하면 같은 특징을 지닐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어요. 그간 한글과 로마자 글꼴 디자인을 공부하면서 깨닫게 된 것은 ‘완벽하게 똑같이 할 수는 없다’라는 것이죠. 그래서 글꼴의 분위기는 비슷하게 맞추되, 언어가 가진 특징에 맞게 바꿔 디자인했습니다.

노은유 대표, 이주희 디자이너는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기존에 가지고 있던 글꼴 디자인에 관한 생각을 깨고 또 깨며 도전했다.

이주희 빙하체를 디자인할 때 그림처럼 느껴졌어요. 보통 글꼴을 디자인하다 보면 1픽셀의 움직임에도 굉장히 신경을 쓰게 되는데, 빙하체는 굉장히 자유로웠죠. 1픽셀을 움직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전체적인 분위기가 중요했고요.

노은유 글꼴 디자이너는 가독성을 생명처럼 여겨요. 그래서 2050년 타입을 디자인할 때 고민이 많았죠. 로마자처럼 가로획을 생략해야 하는지, 가독성을 위해 남겨둬야 하는지요. 이 프로젝트는 글꼴 디자이너인 저희로서도 굉장히 새로운 시도였습니다.

10월 9일 한글날부터 무료 배포되는 빙하체

기후위기 폰트의 한글 버전을 제작하고 싶다는 이야기에 헬싱긴 사노마트는 반겼지만, 제작비를 지원받을 수는 없었다. 한글이 로마자보다 디자인해야 하는 글자 수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고, 최대한 빨리 제작하고 싶은 마음에 텀블벅을 통해 제작비 후원을 받는 것이 좋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노은유 텀블벅 후원에 한국문화예술위원회를 비롯해 여든여섯 명이 참여해주셨고, 목표액을 달성했어요. 빙하체를 후원해주시는 분들에게는 한글날 무료 배포 전까지 베타 버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했고, 글꼴 굿즈도 제작해 보내드리고 있어요.

노은유 대표와 이주희 디자이너에게 빙하체는 ‘목소리’다. 지금 인류가 처한 현실을 글꼴에 담아내, 글꼴이 가진 힘으로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널리 알리고 있기 때문이다. 설사 사용자들이 디자이너의 의도와는 다르게 ‘예뻐서’ 사용하기 시작한다고 해도, 이 글꼴의 이름이 왜 빙하체인지 궁금해 하나하나 알아가다 보면, 빙하체에 담아낸 메시지가 읽히리라고 확신한다. 그것이 빙하체를 알게 된 그 누군가에게는 ‘환경적인 행동의 시작점’이 되기를 희망한다.